신흥사(新興寺)


  •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설악산 신흥사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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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사 역사

雪嶽山 新興寺 由來

 

이 가람은 신라(新羅) 진덕여왕 6년(서기652)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향성사(香城寺) 라고 하였다.

이 이름은 불교의 중향성불토국(衆香城佛土國)이라는 글에서 따온 것인데 중향성(衆香城)은 금강산(金剛山) 철위산(鐵圍山)을 의미하며 불토국(佛土國)은 부처님께서 교화 할 대상적 국토라는 의미와 정치적 형태의 국가라고 하는 뜻과 어울린 말이다.

 

처음 향성사지는 지금의 켄싱턴호텔 자리에 세워져 46년간 존속하다가 효소왕 7년(서기 69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당시 9층이던 향성탑이 현재 켄싱턴호텔 앞에 3층만 남아 있어 옛 향성사의 역사를 말해주듯 옛날을 잊지 않게 하고 있다.

 

향성사가 화재를 당한지 3년 후 의상조사께서 능인암(현재 내원암)터에 다시 중건하고 사명(寺名)을 선정사(禪定寺)라고 개칭 하였다. 그 후 946년간 수많은 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 정진하여 왔으나 조선 인조20년(서기1642)또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된 것을 2년후 영서(靈瑞), 혜원(惠元), 연옥(蓮玉) 세분의 고승들께서 중창을 서원하고 기도 정진 중 비몽사몽간에 백발신인이 나타나서 지금의 신흥사 터를 점지해 주며 “이곳은 누 만대에 삼재가 미치지 않는 신역(神域)이니라” 말씀 하신 후 홀연히 사라지는 기서(奇瑞)를 얻고 절을 중창하니 지금의 신흥사이다. 절 이름을 신인(神人)이 길지(吉地)를 점지해 주어 흥왕(興旺)하게 되었다 하여 신흥사(神興寺)라 한 것이다. 6·25사변때 고성군 건봉사는 전소되었고 영북지역의 대본산 기능이 마비되었을 무렵 고암, 성준 두 스님의 원력으로 여기 신흥사를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승격하여 업무를 이관하게 되었다. 이후 신흥사는 영동지역의 불교를 새롭게 일으키는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불사를 전개해 나갔다. 속초노인복지관을 개관하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사회복지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춘천에는 불교방송지국을 개국하여 포교에 전념하는 사찰이 되었다. 이렇게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 신흥사가 과거의 신흥사가 아니라 새로운 신흥사가 되었다며 신흥사(新興寺)의 귀신 신자(神字)를 시대에 맞게 새로울 신자(新字)로 고쳐 사용하자는 중론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995년부터 영동불교를 새로 일으킨다는 서원을 담아 사명(寺名)을 신흥사(新興寺)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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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우송(雨松) 법호 : 법검(法劍)

 

1979년 속초 신흥사에서 고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1980년 하동 쌍계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송광사, 해인사, 망월사 등의 선원에서 수선안거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 상임감찰, 낙산사 기획국장, 신흥사 기획국장, 신흥사 총무국장,

신흥사 부주지, 계조암 주지, 능인사 주지, 봉정암 주지, 백담사 주지 등을 역임

2009년 6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 주지 취임

신흥사 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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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김씨, 속명은 선종랑(善宗郞).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무 림은 진골출신으로 신라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관직에 있었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던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아들을 낳으면 시주 하여법해(法 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초파일에 자장을 낳았다.

 

천성이 맑고 슬기로워 학문을 깊이 닦아 익혔으며, 어버이를 여읜 뒤부터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 하여 처자를 버리고 홀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조그 만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움직이 기만 하 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하였고, 끈으로 머리 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 미함 을 물리쳤다. 그때 조정의 재상 자리가 비어 그를 기용하려 하였으나 부름 에 응하지않았으므로, 왕은 취임하지 않으면 곧 목을 베라는 엄한 명을 내렸다. 그는 칙명을 듣고, "내 차라 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死 不願百年破戒而生)."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출가를 허락하 였다.

그뒤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 어가 수행하였는데, 그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고 와서 공양하였고, 천인(天 人)이 와서 5계를 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636년(선덕여왕 5) 승실(僧實) 등 제자 10여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먼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물러 있 다는 청량산(淸凉山)의 문수보살상에 은밀한 감응을기도하였다. 7일 동안의 기도 후 꿈에 대성(大聖)이 나타나 사구게(四句偈)를 주었다. 아마도 그는 이 곳에 머무는 동안 화엄사상의 묘지(妙旨)를 터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이곳 문수보살상 앞에 기도하여 꿈에 얻은 게송이 비로 화엄의 내용을 천명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뒤, 중국 장안(長安)으로 갔는데, 당나라 태종을 사신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머 무르게 하였으며, 후한 대접을 하였다. 어느날 한 장님이 그의 설법을 듣고 참회하자 곧 눈을 뜨게 된일이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그를 찾아와 계를 구하는 사람이 매 일 1, 000여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그가 당에서 한참 활동하는 시기에 선덕여 왕은 자장의 귀국을 정식으로 요청한다. 

귀국길에 본국 신라에 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한질과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골고루 마련하였으며, 7년만에 귀 국하였다. 그의 생애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의 홍통(弘通)을 통한 국민교화와 불교 교단의 기강확립이 었다. 어느 해 여름,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강하였 고, 황룡사에서 7일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 불교는 기강이 세워져 있지 못하였고, 조정에서 대국통이라는 높은 직위를 주었던 것도 그로 하여금 전국의 승니(僧尼)들을 관장하도록 하기위해서였다. 한편, 일찍이 자기 집을 절로 바꾸었 던 원녕사를 다시 증축하고, <화엄경>을 강하여 화엄교법(華嚴敎法)을 천명할 때 52명의 여인이 나타나 법 을 듣고 깨 닫자 문인(門人)들이 그 수만큼의 나무를 심어 이적(異蹟)을 기념하였는데, 그 나무를 지식수(知 識樹)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신라에 화엄사상을 최초 로 소개한 인물을 자장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그는 신라야말로 예로부터 불 교와 인연이 깊은 터전이라고 믿었는데, 그러한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은 < 삼국 유사>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저서로는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1 권,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1권,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갈 磨私記)>1 권,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1권, <관행법(觀行法)>1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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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신라시대의 고승(高僧).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 성은 김씨. 한신(韓信)의 아들이다. 19세 때(29세에 출가하였다는 설도 있으나,최근의 고증을 따 랐음.)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출가하였다. 얼마 뒤 중국으로 가기 위하여 원효(元 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오인받고 수십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귀국하는 당나라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 어 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무를 때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그를 관아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히 대접하였다. 얼마 뒤 종남산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을 청하였다.지엄은 전날밤 꿈에 해동(海東)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번성하더니 중국에 와서 덮었는데, 그 위에봉(鳳) 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개의 마니보주 (摩尼寶珠)의 밝은 빛이 멀리까 지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의상을 특별한 예 (禮)로 맞아 제자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곳에서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은밀한 부분까지 분석 하였다. 당나라에 머무르면 서지엄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한 것은 8년 동안의 일 이며,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이르는 중요한 시기에 해당한다. 

의상이 터 득한 화엄사상은 넓고도 깊이 있 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남긴 <화엄일승법 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통하여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신라로 돌아온 그해에 낙산사 (洛山寺)의 관음굴(觀音窟) 에서 관세음보살에 게 기도를 드렸다.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 (白花道場發願文)> 은 그 의 관음신앙 (觀音信仰)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명문이다. 그뒤 부석사 (浮石寺)를 세우기까지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였는데, 이는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귀국 후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 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674년 경주의황복사에서 표훈(表訓)·진정(眞政) 등의 제자들에게 <화엄일승법계도> 를 가르쳤다는 것으로 보아, 부석사가 이 룩되기 전부터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의상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이 전개되어 있었지만, 화엄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 한 것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이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중악 팔공산 미리사 (美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 (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 (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하여 온다. 또, 의상의 교화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많은 제자들의 양성이었다. 그에게는 3, 000명의 제자가 있었고, 또 당시에 아성(亞聖)으로 불린 오진 (悟眞)·지통(智通)·표훈·진정·진장(眞藏)·도융(道融)· 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명의 제자가 있었다. 

이밖에도 <송고승전>에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그리고 <법계도기총수록 (法界圖記叢隨錄)>에 나타나는신림(神琳) 등이 의상의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항상 스승을 모시면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의상은황복사에서 이들에게 <법계도>를 가르쳤고, 부석사에서 40일간의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추동(錐洞) 에서 <화엄경>을 90일 간에 걸쳐 강의하였다. 지통의 <추동기(錐洞記)>, 도신의 <도신장(道身章)>, 법융의 <법융기(法融記)>, 진수의 <진수기(眞秀記)> 등은 모두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문헌들이다. 668년(문무왕 8)에 세수 78세로 태연자약하게 입적하였다고 한다. 저술로는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記)>1권, <화엄일승법계도>1권, <백화도량발원문>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 (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Korea Tour 영상

신흥사 전경

포토갤러리

출처 : http://koreantemples.com

신흥사 정보

24903  강원도 속초시 설악산로 1137 설악산 신흥사 

문의 033-636-7044 | 팩스 033-636-7556

신흥사 홈페이지 : http://www.sinheungsa.kr  | 신흥사 탬플스테이 : http://tstay.sinheungsa.kr/

신흥사 오시는 길

 

  • 동서울종합터미널(서울시 광진구 구의동, 지하철 2호선 강변역)에서는 원통,양양,속초행 고 속버스(3,4번 승강장)를 이용할 수 있으며 다른 터미널과 달리 외설악의 초입인 물치삼거리 (설악동 입구 삼거리)와 낙산사에 정차하는 버스노선이 있다. 속초시외터미널까지 가지 않고 물치삼거리에서 하차하면 외설악의 관문인 설악동 소공원까지 가는데 40~50분의 시간을 단 축할 수 있다. 
  •  속초시내에서 신흥사까지 시내버스는 10분마다 운행.3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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